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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49. <부정공>관영배유인양천허씨행록(寬永配孺人陽川許氏行錄)
1. 문헌 목록 〉23. 23世 〉51. <부정공>규동배효열부죽산안씨전(圭東配孝烈婦竹山安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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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부정공>근수배열부문화유씨묘표(根洙配烈婦文化柳氏墓表)
(부정공후)23世근수(根洙)配 열부문화유씨묘표(烈婦文化柳氏墓表) 庚戌八月石圃趙公根洙聞國變作詩訣其妻出門不知所之妻柳氏自其去日築壇禱天冀夫還歸己而跡其浮海知必無幸祭之以其日育其孤子女三人置田宅卒嫁娶藏夫遺詩于篋雖家人不以示也至其子漢容誕第二子然後迺曰吾得不負夫子托矣招其女壻申陽秀至付以篋詩因不食十數日以乙未二月初五日終夫去時孺人年僅二十六至是七十一矣葬順天住巖坊白鹿後 負壬之原陽秀以狀及詩來示余曰自公入海孺人即己有殉夫志以遺書托孤故隱忍至此今卒就之可不謂烈哉余曰然抑有他乎陽秀言公在時借人廊廡居之中歲己徒處久矣晚更買廊廡獨處其中將終鬻之其不忘與公居也其示不復居也意皆可見矣嗚呼婦人年少下從例多出於崩迫之情若其積四十年隱忍不發既老事畢子孫衣食始可以樂而浩然不復顧也惟初志是安可謂從容而不迫者矣趙貫玉川前副正虔谷瑜是爲著祖柳籍文化忠景公亮顯于中世孺人父赫模母玉川趙鎭匡女男即漢容生二男芳翼道翼女申陽秀趙庸昱陽秀既公謀所以表其事者又求不朽孺人非好義樂成人之美能乎哉 乙未 孟秋 光山 金文鈺 撰 (부정공후)23世근수(根洙)配 열부문화유씨묘표(烈婦文化柳氏墓表) 경술년(一九一0) 八월 석포(石圃) 조공 근수(根洙)가 국변(國變)을 듣고 시를 지어 그 처를 결별하고 문을 나가 간 곳을 모르니, 부인 유 씨가 간 날로부터 단을 쌓고 하늘에 빌어 지아비의 생환을 바라더니 이윽고 그 바다로 간 자취를 보고는 반드시 무사하지 못할 줄 알고 그날로써 제사 지내며 외로운 자녀 세 명을 기르며 전답을 장만하고 혼가를 마쳤으며 지아비가 남긴 시를 상자에 감추고는 비록 집안사람이라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 아들 한용(漢容)이 두 아들을 낳은 연후에야 비로소 말하기를, 『내가 군자의 부탁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하고는 그 사위 신양수(申陽秀)를 불러서 상자 속의 시를 맡기고는 十여 일을 먹지 않고 을미년(一九五五) 二월초 五일에 자진하니 시아비가 나갈 때 겨우 二十세이던 유인이 그때 七十一세였다. 순천 주암방 백록 뒤 임좌언덕에 장사하였다. 양수가 장문 및 시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공이 바다에 들어간 뒤로부터 유인이 즉시 따라 죽을 뜻이 있었으나 유서로서 고아를 부탁했기 때문에 억지로 참고 이에 이르렀다가 이제 마침내 순절하였으니 가히 열녀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또 다른 말이 있겠는가.』 하니 양수가 말하기를, 『공이 생시에 남의 행랑을 빌어 살다가 중년에 이미 이사한 지 오래더니, 부인이 말년에 다시 행랑을 사서 홀로 그 가운데 거처하다가 장차 종신하면서 팔았으니, 공과 함께 산 것을 잊지 아니하고 다시 살지 아니할 것을 보임이니 뜻을 가히 알 수 있다.』 하였다. 아, 부인이 젊어서 자진한 것은 흔히 박절한 정에 비롯한 것인데 만일 그 四十년 세월을 지내며 억지로 참고 드러내지 않다가 이미 늙고 모든 일을 끝내어 자손과 의식이 비로소 즐거워할만 하였는데 호연히 돌아보지 않고 오직 처음 뜻을 지켰으니 가히 조용히 취사한 것이라 하겠다. 조 씨의 관향은 순창으로 전부정 건곡공이 현조요 유 씨의 적은 문화로 충경공 양(亮)이 중세 현조며 유인의 부는 혁모(赫模)요, 비는 순창 조 씨 진광(鎭匡)의 따님이며 남은 한용이요, 손자는 방익(芳翼), 도익(道翼)이며 사위는 신양수(申陽秀)·조용욱(趙庸昱)이다. 양수는 이미 공을 위하여 그 일을 표하고자 꾀한 자이고 또 영구히 전할 것을 구하고 유인이 의리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이런 사람의 아름다움을 능히 이룰 수 있었겠는가. 광산(光山) 김문옥(金文鈺)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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